농사에서 기계를 쓰지 않는다는 것은 단순한 방식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삶의 태도를 바꾸는 일이며, 몸과 자연 사이의 관계를 다시 맺는 일이다. 나는 무경운 농법을 몸에 맞는 옷처럼 여긴다. 누구나 각자의 체형에 맞는 옷이 다르듯, 이 농법도 사람마다 방식이 다르다. 매년 몸이 변하듯, 논밭과 농사도 달라진다. 그 변화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삶이 신선해진다.
시작은 어렵고, 돌아보면 길이 된다
처음부터 무경운을 꿈꿨다. 책에서 본 자연농법의 매력에 빠져들었고, 기계 없이도 가능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자연은 생각보다 거칠고, 풀은 맹렬히 자라났다. 여름 장마철이 되자,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몸도 마음도 준비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경운기와 관리기를 구입해야 했다.
하지만 무경운을 포기하진 않았다. 한 걸음씩 다시 시작했다. 처음엔 고작 30평 남짓한 밭이었지만, 지금은 1,000평이 넘는 밭과 논 일부를 무경운 방식으로 짓는다. 기계를 병행하되, 가능한 만큼 몸으로 농사짓는 꿈은 계속되고 있다.
무경운 농법의 본질은?
무경운은 인류가 가장 먼저 시작한 농법이다. 토양을 갈지 않고, 자연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는 방식이다. 수렵과 채집 다음 단계에서 사람들은 땅을 크게 훼손하지 않고도 식물을 기르는 법을 익혔다. 그 오랜 지혜가 고스란히 담긴 것이 무경운이다.ib612.com
또한 이 농법은 자연에 훨씬 가깝다. 기계가 없는 만큼 소리도 냄새도 적다. 대신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 새소리, 흙 냄새가 가득하다. 무엇보다 손과 발로 하는 일이기에 누구나 가능하다. 아이도, 노인도 참여할 수 있다. 다만 큰 수확이나 대규모 농업보다는 자급자족에 가까운 삶을 선택하게 된다.
흙을 살리는 법 — 무경운 밭 이야기
밭의 흙을 되살리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처음 몇 해는 기계의 힘을 빌려 유기물을 충분히 넣는다. 낙엽, 가지, 볏짚, 퇴비, 발효된 깻묵 등을 흙과 섞는다. 이후로는 땅을 갈지 않고 유기물을 계속해서 위에 덮는다. 해가 갈수록 흙은 부드러워지고, 수분을 잘 머금으며, 마음이 편안해지는 밭으로 바뀐다.
이런 밭에서는 대부분의 작물이 잘 자란다. 다만 영양분을 많이 요구하는 작물들에겐 자리에 따라 웃거름이나 액비를 더해준다.
흙 속 생명들과의 공존
유기물이 들어가면 가장 먼저 나타나는 존재는 지렁이다. 연필만큼 굵고 손바닥만큼 긴 지렁이들이 흙을 부지런히 움직인다. 곧이어 두더지도 나타난다. 이들은 땅을 갈아엎지는 않지만 땅속을 조심스럽게 파 다닌다. 덕분에 흙이 부드러워져 손으로도 쉽게 감자를 캘 수 있다.
두더지를 따라 뱀도 찾아온다. 두더지를 먹기 위해 구멍 위를 맴도는 뱀은, 이 땅 위에서 먹이사슬이 다시 살아났다는 증거다. 생태계가 다시 순환하는 것이다.
거세미와의 싸움
무경운 농사의 골칫덩이는 거세미다. 밤에만 활동하며 작물의 줄기를 싹둑 잘라버린다. 여러 방법을 동원해봤지만, 결정적인 해법은 없다. 결국은 부지런히 돌보며 그때그때 잡아주는 수밖에 없다. 무경운 초기 몇 년이 가장 피해가 크다. 여유 있게 심고, 모종을 남기는 여백의 농사가 필요하다.
풀과 함께 살아가기
피복을 잘하면 잡초는 줄어든다. 흙 위에 깔린 볏짚이나 풀은 잡초를 억제하고, 물도 지킨다. 하지만 전면 피복은 쉽지 않다. 계절마다 덮은 유기물이 사라지고, 다시 보충해야 한다. 그래서 잡초 뽑기는 여전히 중요한 일이다.
풀을 미워하지 않고, 나물로 생각하면 김매기도 달라진다. 겨울철의 잡초인 점나도나물, 망초, 광대나물은 훌륭한 먹거리다. 또 옥수수를 심은 밭엔 일부러 약간의 풀을 남겨둔다. 새 피해를 막기 위해서다. 마늘밭에 돋은 달래, 자연스럽게 자란 들깨, 기장, 명아주도 함께 키운다. 곡식도 풀처럼 함께 섞어 심고, 가꿀 수 있다.
무경운 논 — 천천히, 그러나 단단하게
논에서도 무경운은 가능하다. 150평 정도의 논이면 쌀 두 가마니 정도 수확한다. 나이 들어도 가능한 농사, 일명 ‘할머니·할아버지 논’이다.
가을에 볏짚과 왕겨를 골고루 뿌리고, 봄에는 쌀겨를 덧댄다. 논물은 배수로를 잘 파고, 둑을 단단히 다져야 관리가 수월하다. 가장 큰 문제는 둑새풀이다. 이 풀은 이른 봄에 급속히 자라나 모를 해친다. 늦겨울부터 꾸준히 뽑아야 한다. 이후 물을 잡고 오리를 풀어놓으면 풀이 억제된다.ib612.com
모는 심듯이 하나하나 손으로 꽂는다. 손가락으로도, 호미로도 가능하지만, 시간이 많이 걸린다. 그러나 그 느림 속에서 평화를 느낄 수 있다.
무경운 농사, 삶을 다시 짓는 일
무경운은 단순히 작물만 키우는 방식이 아니다. 전인적 삶의 방식이다. 몸을 움직여 흙을 만지고, 자연과 가까워지면서 몸도 마음도 건강해진다. 아이들과 함께 하기도 좋다. 교육, 예술, 건강, 관계, 무엇 하나 농사와 동떨어져 있지 않다.
기계를 쓰면 빠르게 끝나지만, 무경운은 느림 속에서 명상을 하고, 흙과 대화하게 만든다. 해마다 달라지는 흙의 결, 풀의 얼굴, 벌레의 움직임을 읽으며 사람도 함께 깨어난다.
그 안에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진짜 소득이 있다. 자유, 평화, 생명에 대한 존중. 무경운은 결국 사람과 자연이 서로를 살리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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