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의 술자리 게임, 14면체 주사위 주령구(酒令具)

고대 신라 시대, 왕도(王都)였던 경주. 그 한가운데 자리한 인공 연못 안압지(월지)에서 1975년, 놀라운 유물이 출토됩니다. 바로 14면체 나무 주사위 - 주령구입니다. 이 ‘술 마실 때 던지는 주사위’는 지금까지 전해진 고대의 음주 놀이 도구 중에서 독보적으로 흥미롭습니다.

주령구란 무엇인가

주령구는 “酒令具”, 즉 ‘술(酒)을 명령(令)하는 도구(具)’라는 뜻을 지닌 이름입니다. 형태는 총 14면체. 구체적으로 정사각형 면 6개, 육각형 면 8개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재질은 참나무(목제)로 만들어졌다고 전해집니다. 높이는 약 4.8 cm 정도였다는 연구 자료도 있습니다. 이 독특한 형태는 당시로서는 매우 이례적입니다. 오늘날 일반적인 6면 주사위 대신, 14개의 면을 둠으로써 더욱 다양한 벌칙과 변수를 주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왜 술자리 주사위였나

처음에는 단순한 ‘기하학적 모양의 돌기구’로만 여겨졌지만, 각 면에 새겨진 한문(漢字) 덕분에 그 용도가 밝혀졌습니다. 각 면마다 “술잔 세 잔을 한번에 마시기”, “노래 부르기”, “춤추기”, “시 읊기” 등 다양한 행동을 지시하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ib612.com_해달바람비

문구는 다음과 같습니다.

금성작무 (禁聲作舞)- 노래없이 춤 추기(무반주 댄스)
중인타비 (衆人打鼻)- 여러 사람 코 때리기
음진대소 (飮盡大笑)- 술잔 비우고 크게 웃기(원샷)
삼잔일거 (三盞一去)- 술 석잔을 한번에 마시기
유범공과 (有犯空過)- 덤벼드는 사람이 있어도 참고 가만 있기
자창자음 (自唱自飮)- 스스로 노래 부르고 마시기
곡비즉진 (曲臂則盡)- 팔을 구부려 다 마시기(러브샷)
농면공과 (弄面孔過)- 얼굴 간지러움을 태워도(놀려도) 참기
임의청가 (任意請歌)- 마음대로 노래 청하기
월경일곡 (月鏡一曲)- 월경 노래 한 곡 부르기
공영시과 (空詠詩過)- 시 한수 읊기
양잔즉방 (兩盞則放)- 두잔이 있으면 즉시 비우기
추물막방 (醜物莫放)- 더러운 것 버리지 않기
자창괴래만 (自唱怪來晩)- 스스로 괴래만을 부르기(도깨비 부르기)

이를 통해, 고대 신라의 귀족들이 단지 술을 마시기만 한 것이 아니라, 유희와 풍류 - 노래, 춤, 시, 장난까지 포함한 복합적인 즐거움을 나누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출토와 현재 - 진품은 사라지고 복제품만 남다.

주령구는 1975년 안압지 준설 공사 중 연못 바닥에서 발견되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출토된 원본은 보존 처리 과정에서 전기 과부하로 인한 화재로 소실되어 버렸습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소실 전에 사진 촬영과 정밀 측정이 이뤄져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여러 복제품이 제작되었습니다. 오늘날에는 복제품이 국립경주박물관 등을 통해 일반에 공개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7~9세기 신라 사람들이 손에 쥔 진품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주령구는 문화재 보존의 중요성을 다시 생각하게 만듭니다.

왜 이 유물이 우리에게 중요한가

- 음주와 유흥을 단순한 소비가 아닌 ‘문화’로 즐긴 고대 사회의 흔적

오늘날 우리가 술자리에서 노래하고 춤추며 웃는 것처럼, 1,400여 년 전에도 사람들은 비슷한 방식으로 즐거움을 나눴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 놀이문화와 사회적 유대의 한 형태

주사위를 던지고, 결과에 따라 모두가 웃고 노래하고 장난을 치는 모습은 단순한 취기가 아닌 공동체의 유대와 유희의 공동체성을 보여줍니다.

- 고고학과 보존의 중요성

원본의 소실이라는 안타까운 사례를 통해, 유물 하나하나가 얼마나 소중한지, 그리고 후대가 무엇을 물려받아야 하는지 생각하게 합니다. ib612.com_해달바람비

끝으로

고대의 나무 주사위 하나가, 1,400여 년을 뛰어넘어 오늘날 우리에게 웃음과 호기심을 던져줍니다. 주령구는 단순한 술자리 도구가 아니라, 당시 신라 사람들이 어떻게 즐기고, 사람들과 어울렸는지를 보여주는 작은 창입니다.

원본은 사라졌지만, 복제품으로라도 남은 주령구를 통해 우리는 과거와 연결될 수 있습니다. 만약 기회가 있다면, 복제품이 전시된 박물관을 찾아 직접 보고 손끝으로 그 면을 느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도 언젠가 주령구를 던지고 나오는 글귀 하나에 웃음을 터뜨리는 상상을 해 보길 바랍니다 - “이보게, 석잔을 한 번에!”

#주령구 #안압지 #경주 #통일신라 #14면체주사위 #고대유물 #신라음주문화 #술자리게임 #복불복 #목제주사위 #전통문화 #역사 #국립경주박물관 #고고학 #고대놀이 #한국사 #술게임 #신라귀족

주령구

해달바람비

이 블로그 검색